타인의 틈에서 자신으로 존재하기 <리플리>

  • 작성자 하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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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틈에서 자신으로 존재하기

<리플리>


김지윤(연극학과 연극학전공 예술사과정)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져(被投) 태어났지만 스스로에 대한 물음으로 자아를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타인 관계는 기본적으로 ‘소외와 갈등’이다. 자신 안에 있던 자아는 타자의 시선에

노출됨으로써 남의 의식과 세계 속에서 객체화되어 형성되어 남의 것이 되고 만다. 뮤지컬 <리플리>는 타인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차이와 결여에 묶여 자신의 본질을 마주하지 못하고 혐오하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에 닿는 지난하고도 강렬한 일종의 인정투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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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통 속 아끼는 연필


시인을 꿈꾸지만 꿈속에서조차 시를 써본 적 없는 우영은 앉은 자리에서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는 ‘톰’을, 그 필명을 가진 재이와 그의 시를 선망한다. 두 중학생의 관계는 동경과 우정으로 시작되지만 돈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가난한 소년 재이와 대기업 자제인 우영 사이 가정적 배경의 차이는 곡절을 만들고, 인물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재력과 재능의 양극단적인 차이라는 인물 설정은 다소 전형적이기도 하지만 극의 시대적 배경을 외환 위기 사태(IMF) 1 년 차, 1998 년의 한국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실적 문제로의 설득력을 꾀했다. 우영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여유를 재이의 백일장 참가비를 내주는 격려로, 고급 식당이라는 연민으로 포장했으나 그 속에 스며든 무시와 멸시는 감춰지지 못했다. 반지하와 명품 브랜드 향수에서 밴 향처럼 말이다. 재이는 우영의 향수를 훔쳐 그의 부재에도 존재를 상상해 냈고, 자신이 그 자체가 되기를 갈망한다.


줄곧 원만한 멜로디에 머물렀던 재이의 넘버는 이제 강렬하게 고조된다. 클래식과 탱고를 기반으로 구성된 작품의 음악에서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듀엣 넘버는 대체로 고저를 부드럽게 오르고 내리는 반면, 각 인물은 감정에 따라 상승을 향해 고조되는 특징을 가진다. 오직 피아노 한 대로 연주되는 음악은 장면들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며 효과적으로 상황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무대에는 큰 격자무늬 틀이 매달려 있어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연상시키고,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털어놓는 극 전반의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심화시킨다. 또한 계단이 많은 구조를 통해 위와 아래, 상승과 하락이라는 수직적 구조를 직관적으로 시각화했다. 재이의 집은 계단을 내려가야 위치해있고, 우영의 등굣길을 지켜보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 식의 약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위에 닿고 싶던 욕망은 그 층계를 정직하게 오르는 대신 계단을 마모시켜 상대를 끌어내리고자 했고 결국 본인이 미끄러지게 된다.


연필을 깎아 닳게 하기


10년이 흐른 2008년, 대단한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는 재능을, 그리고 그 사람이 되고 싶었던 존재는 생을 훔치고자 하는 욕망을 감춘 채 재회한다. 자신의 시점으로 원하는 바를 향하는 대신, 타인의 시점으로 자신을 내려다본 두 사람의 열등감은 집착으로 변모되고, 결국 자신 스스로를 세상에서 없애고자 하며 비틀린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재이는 강우영의 생을 훔친다. 하지만 그의 식은 육체에 강재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묻어버리는 어긋난 방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제 재이는 강우영의 생을 끌어안고, 적절한 타이밍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의 생각까지 떠안아 버렸다. 재이가 대신 써준 시로 신춘문예에 등단하며 ‘천재 시인의 탄생’으로 떠받들어진 우영으로 자신의 안팎을 바꾸었으니 재이는 이제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른 이름 속에서 시를 쓸 수 있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죽은 진짜 나를 꺼내는 일은 연필과 노트가 아닌 칩과 카드 위로 향했고 그의 손을, 톰을 잘리게 했다. 혐오하는 나 대신 거짓된 무엇, 더 나은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존재는 결국 모든 걸 잃고 나서야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마침표 찍기

재이는 기억으로 시를 창작하는 일을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사는 것’이라 설명한다. 비에 젖은 흙처럼 단단하지 못한 땅 위에 위태로이 서 있던 두 사람은 슬픈 인연으로 남게 되었다. 원고지의 마지막 칸에서 문장이 끝나면 칸 밖에 쓰이는 마침표처럼, 자신을 부정한 채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이는 자신의 본질과 존재 의미는 보지 못하고 벗어난 위치만을, 타자와 자신 사이의 선에만 매몰되었다.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의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새로운 선택을 이어가며 존재하는 일은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빈 여백을 향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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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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