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깎아야 할 손톱이었다
<술 먹고 손톱을 깎았는데 발톱이 짧아졌다>
남서영(연극학과 연극학전공 예술사과정)
최근 들어 허리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 탓에 집에만 눌러붙고 싶은 마음과 어긋나는 현실로 인한 반발심이 충동적 소비로 이어졌고, 당근마켓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마시마로 인형을 올리기 위해 예쁜 사진을 찍고 싶어 자리를 끝없이 치우다 보니 디스크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우리의 삶엔 인과는 존재하나 개연성은 부재한다. 아직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삶의 조각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연극은 개연성을 갖추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술 먹고 발톱을 깎았는데 손톱이 짧아졌다>는 연극의 향유자들이 기대하지 않는 삶의 부자연스럽고 병렬적인 흐름을 재현한다. 인생이란 수많은 사건이 흩어지고 합쳐진 것이며, 그 끝에 다다라야지만 생애의 줄기로 꿸 수 있다. 허나 그 줄기가 대단히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저 하나의 이름 아래 묶여있을 뿐, 극을 구성하는 14개의 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진법 사이의 오아시스
자유로이 착석하는 객석은 상당히 불편하다. 등받이 없이 실험무대의 흡음 처리 벽면에 허리를 기대야 하는 탓과, 운이 나쁘다면 발치 바로 앞에 무대의 대도구들을 엮은 ‘줄을 당기는 사람’이 자리해 있는 이유이고, 또 운이 더욱 나쁘다면 배우들의 첫 등장을 목격하지 못한 채 마인크래프트 게임 화면만 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연속적으로 제시되는 장면들은 이를 해소시키지 못한다. 마인크래프트, 세운상가, 극작가, 돼지, 파리바게트 알바생의 이야기는 쉼 없이 던져지며 혼란에 박차를 가해, 불편함 속에 관객은 편히 마음이라도 기댈 구석을 찾는다.
본가에는 속을 썩이는 고철덩어리 로봇청소기가 있었다. 집의 구조를 인식하여 구석구석 먼지를 쓸어준다는 홍보와는 다르게 소파 밑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 녀석은 금세 중고로 다른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 기술이란 아직 갈 길이 많이 멀었구나, 하는 회의가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데, <술 먹고 발톱을 깎았는데 손톱이 짧아졌다>의 로봇청소기 덕배는 관객에게 어찌나 사랑스러운 존재로 자리 잡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 속 덕배의 성찰적 대사는 위안을 부른다. 자신의 존재에 다소의 회의를 표하면서도 다정한 사투리 섞인 발화와, 바닥을 느리고 불규칙적으로 미끄러져 다니는 행동은 무생물에 애착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인간 배우들이 전개하는 장면과 관계없이 묵묵히 먼지가 날리는 극장을 자긍심으로 청소하는 덕배는 말 그대로 ‘씬 스틸러’ 이다. 어지러운 극 속 덕배는 쫓을 등대가 되어 준다.
스톡홀롬 신드롬
무대 위 배우들은 알 수 없는 연출과 극작에 대해 종종 불평한다. 관객은 초기엔 이에 감응하나 점차 의심에 스물스물 휩싸인다. 불만의 표출 역시 이 극을 위해 만들어진 대사의 일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배우들은 ‘억지로’ 관객의 편을 들어주는 연기를 할까 고민하다 보면, 왜 자신이 이곳에 자리해 있는지 질문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미 극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납치’, 단어가 귀를 스치면 한날한시에 모인 목격자들은 스스로가 관객으로서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 하에 납치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무대 위 배우들은 납치의 동조자들이나 우리에게 안도감, 혹은 동질감을 심어주기 위해 같은 처지임을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은 해소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질적인 담론의 나열을 강제로 목격시키며 보다 큰 구조를 몸소 느끼게 한다. 우리는 장면에 빠져들지 않고, 드넓은 세계 속 작은 블랙박스 극장에 갇혀 ‘나’를 더욱 치열하게 감각한다.
빈곤한 이미지
서서히 조여드는 대도구를 엮은 줄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할 때 비로소 관객은 세상으로 풀려난다. 기이하고 강렬한 이미지들은 짙은 잔상을 남겨, 관객에게 이의 의미를 성찰하게 만드나 다시 좌절로 회귀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원할 것 같던 이미지는 해상도를 낮춘 채 모호하게 목격자의 뇌 속을 유영한다. 극의 창작에 있어 분명한 의도로 작동하는 히토슈타이얼의 ‘빈곤한 이미지’ 이론과 극을 연결짓는다면 <술 먹고 발톱을 깎았는데 손톱이 짧아졌다>의 목표는 연극의 규범화를 벗어나 현실 속에서 우연히 재생산되길 희망치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는 자는 의미를 구조적으로 포장해 전달하는 기성의 연극보다도 원본, 즉 극작가가 제시하길 희망한 본래의 메세지보다 그것이 매우 희석된 불연속적인 장면들의 형상인 이 극의 계급이 낮지 않다 평가하리라. 파리바게트를 지나칠 때, 어쩌다 세운상가를 방문할 때, 결국 다시 로봇청소기를 집에 들이게 될 때 아주 낮은 해상도로 존재하던 극의 이미지는 곳곳의 납치 피해자들에게 접점을 형성할 것이다.
발톱을 깎았는데 왜 손톱이 짧아졌는지 고뇌할 필요가 있을까, ‘깎는다’ 는 행위로 연결된 인과가 있는 것이 다이다. 고민은 마치 바닥에 떨어졌지만 로봇청소기조차 치우길 거부하는 롤케이크와 같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우리는 그저 긴 인생 속 잠깐의 납치를 겪었을 뿐이니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