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을 온전히 누리는 법
2026-1 연출과 졸업 공연 <네버랜드 카니발>
김소정 (연극학과 연극학전공 예술사과정)
흔히 사람들은 망각을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라 말한다. 지독한 슬픔과 아픔에 침잠할 때, 그 감정의 근원을 감쪽같이 도려낼 수만 있다면 생은 영원히 편안할 것도 같다. 그래서 그 상처를 도려내게끔 유도하는 도피처는 너무나 유혹적이다. 하지만, 유혹적이어서 되레 위험하다. 모든 일을 까맣게 망각하고 자신의 방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끝내 자기 자신을 자라지 못하게 한다. “절망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아주 조용히 일어나기도 한다.”라는 키르케고르의 격언처럼, 성장으로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아의 성숙함은 필연적으로 유실되기 때문이다. <네버랜드 카니발>은 바로 이 지점,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라는 명분 아래 성장의 “실현 가능한 희망”을 거부한 존재들의 서사를 세심하게 파고든다.
조작된 낙원과 균열
‘네버랜드 카니발’, 이곳에는 노화도, 슬픔도, 상실도 없다. 무대는 ‘네버랜드’를 그대로 표상하듯 시간의 흐름뿐 아니라 고통과 슬픔이 완전히 소멸한 유년의 성역을 그려낸다. 놀이공원을 연상케 하는 화려한 무대 세트, 번쩍이는 불빛, 관객의 시각을 사로잡는 서커스의 풍경은 현실로부터 인물들을 보호해 주는 아늑한 피난처다. 루카는 마에스트로가 제공하는 조작된 안락함에 영원히 안주하고자 한다. 그에게 이곳은 절대적인 낙원이며, 외부의 고해(苦海)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주는 유일한 구원이다.
그러나 루카의 안락한 낙원은 바깥 세계의 흔적을 품고 침입한 엘리의 등장으로 균열을 맞이한다. 엘리는 기억과 질문을 담보로 한 안전 수칙이 사실은 존재를 가두는 외딴방의 창살임을 폭로한다. ‘문을 열지 말 것’, ‘질문하지 말 것’이라는 금기는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반드시 행해야만 하는 뒤집힌 열쇠가 된다. 루카는 이 열쇠를 통해 외면해 왔던 잔혹한 현실을 단계적으로 직면한다. 이 과정에서 무대가 지닌 극단적인 화려함은 오히려 이질적인 불안을 극대화한다. 비현실적일 만큼 달콤하고 아름다운 무대는 관객이 기어코 이 몽환의 축제에서 벗어나 현실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체감하게 한다.
대립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기
<네버랜드 카니발>의 드라마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은 인물들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순간의 음악적 충돌에 있다. 특히, 후반부의 삼중창 ‘낙원’에서는 루카에게 영원한 맹목을 종용하는 마에스트로와 자신과 함께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가길 권하는 엘리, 그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루카의 내면적 갈등이 외적으로 충돌하며 서사적 압박감이 극대화된다. 이들의 갈등은 동시에 안에서 밖으로 솟구치듯 터져 나오며 첨예하게 대립하고, 이는 루카가 자신의 손으로 외딴방의 문을 여는 결단으로 이어진다. 영원한 도피는 구원이 될 수 없으며, 괴로움을 감내하는 고통의 순간이 때로는 생의 지평을 넓혀주기도 한다는 주제 의식이 무대에 구현되는 순간이다.
루카는 자신의 방을 돌아보며 과거와 대면하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기를 선언한다. 그의 독창은 성장이 결코 타인에게 전가될 수 없으며, 온전히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야 하는 과제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루카가 네버랜드 카니발과 마에스트로에게 건네는 작별의 인사는 결코 슬픈 이별의 언어가 아니다. 안식처로 위장되었던 견고한 보호를 뿌리치는 주문이자, 온전히 홀로 서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어른의 다짐이다. 이윽고 카니발의 문이 열리고, 엘리와 루카는 함께 손을 맞잡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고통과 아픔으로 진창이 된 그 세계를 마주하는 용기가 곧 진정한 삶의 찬란함으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하는 결말이다. 또한, 이 결말은 하나의 개인이 고립을 극복해 내는 서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루카의 선언, 그리고 엘리와의 결합은 단절되었던 세상과 개인이 언제든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도피의 외딴방에서 삶의 광장으로
이 작품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판타지적 설정을 빌려와, 매일 조금씩 성장하며 현실을 이겨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신이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망각은 결코 삶의 일부를 완전히 도려내 주지는 않는다. 대신 그 상처를 받아들이고, 그 위로 새살을 키워내며, 그 상흔보다 훌쩍 자란 자신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망각이라는 신의 선물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제 무대의 막이 내리고, <네버랜드 카니발>의 문이 열리면 관객은 다시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극장 밖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절망과 좌절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때로는 아늑한 온실로 다시 도망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그 세계를 헤쳐나간 수많은 이들을, 엘리를, 루카를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희망을 얻는다. 그러니 이제, 두려움은 잊고 카니발의 문을 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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