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리스닝 파티가 재생한 비극의 감각
2026-1 전문사 연출 III <로줄3>
김채영 (연극학과 연극학전공 예술사과정)
공연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은 낯선 파티에 초대된 듯한 분위기와 마주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와인잔과 음료. 관객들은 그것을 자유롭게 집어들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다. 2026년 6월 11일부터 13일까지 실험무대에서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 3>은 이 작은 환대에서 출발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공연을 '보러 온 사람'에 그치지 않고 어떤 사건 안으로 '초대된 사람'이라는 감각을 열어주었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AI 음악으로 만들어 리스닝 파티를 연다는 형식을 택했다. 고전 비극을 음악, 조명, 오브제, 퍼포머의 움직임으로 재해석한 이 공연은 시작 전부터 ‘무엇이 연극인가’라는 질문을 관객 앞에 조용히 놓아둔다.
관람 규칙을 흔드는 파티의 형식
극장 안쪽 벽에 걸린 흰 천에는 빨간 락커로 "핸드폰이나 하세요"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일반적으로 공연장에서 금지되는 행위를 오히려 권하는 듯한 이 문장은 기존의 공연 관람 규칙을 일부러 흔드는 듯했다. 관객들이 2층에서 1층 무대를 내려다보는 구조였는데 정해진 관람 규칙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누군가는 앉아서 누군가는 선 채로 공연을 관람했다.
1층에는 조명감독이 실시간으로 조명을 조작했고, 2층 한쪽에서는 음악감독이 DJ처럼 AI 음악을 재생하고 있었다. 보통 무대 뒤에 숨겨지는 기술 파트가 관객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면서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장면처럼 보였다. 음료 반입과 핸드폰 사용을 허용하는 자유로운 관람 방식과 조명감독과 음악감독의 작업 과정이 관객에게 노출되는 구성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3〉이 전통적인 연극을 벗어나 있음을 알려주었다.
대사가 음악으로: 청취되는 셰익스피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거의 대부분의 대사가 AI 음악의 가사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원작 대본의 프롤로그가 ‘오늘 우리 무대에서 펼쳐질’ 이야기를 예고하며 관객에게 ‘귀 기울인다면’ 놓친 부분을 채워내겠다고 말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 3〉는 그 '듣기'의 조건을 AI 음악과 리스닝 파티의 형식으로 확장한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익숙한 이야기가 낯선 소리와 이미지로 바뀌는 과정을 바라보게 된다.
사물의 리듬으로 표현된 서사
무대 위의 조명과 오브제들은 원작의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했다.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무빙라이트는 방향을 바꾸었고, 풋라이트와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조명은 장면의 온도를 조절했다. 몬테규 가문의 가사에 맞춰 빨강, 분홍, 연두색 탁구공이 떨어지는 순간에는 가문의 이름과 갈등이 색채와 소리로 감각되었다. 로미오가 줄리엣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불안이 더 크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공사장의 안전모가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인물의 심리적 동요는 배우의 표정이나 목소리로 표현되지 않고 오르내리는 사물의 움직임으로 불안의 리듬을 대신했다.
이러한 방식은 1막 5장의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장면은 로미오가 캐플릿의 연회로 들어가 줄리엣을 처음 만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러나 공연은 이 장면을 힙합 음악과 자동차의 움직임, 포그머신의 연기, 공사장 안전모 같은 요소들로 파티장으로 향하는 로미오의 상황을 대신했다. 로미오의 이동은 자동차가 움직이는 이미지로 다가왔고 무도회라는 낭만적인 사교의 공간이 어딘가 기계적이고 인공적인 리듬이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보였다.
2막 2장의 발코니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 발코니는 줄리엣이 위쪽에서 등장해 아래의 로미오를 바라보는 낭만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연은 지미집 위에 올라간 줄리엣과 로미오로 바꾸어놓았다. 줄리엣이 지미집 위에 올라 휴대전화를 보며 대사를 읽는 순간, 발코니 장면의 고백은 인물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이 아닌 화면 속 텍스트를 읽고 수행하는 행위로 전환되었다.
비극 연기를 벗어난 퍼포머
AI 음악과 오브제가 무대의 많은 부분을 채우는 가운데 배우들은 인물을 사실적으로 연기하거나 감정을 실어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본을 핸드폰으로 보며 건조하고 기계적인 톤으로 발화했고 때로는 춤을 추거나 탁구공을 던지며 무대 위 사물과 장치에 반응했다. 이때 배우의 몸은 AI 음악과 조명, 오브제의 작동 속에 놓인 하나의 요소로 보였다.
이러한 특징은 3막 1장의 싸움 장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머큐리오와 티볼트의 싸움으로 이야기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배우들은 이 장면을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배우들은 무대 바닥을 밟으며 뛰고, 찔림과 쓰러짐을 절규나 비명 대신 "아아"와 같은 짧은 발화와 몸의 낙하로 처리했다. 감정이 덜어진 비명과 움직임은 관객이 익숙하게 기대하는 처절한 감정 연기를 의도적으로 비껴가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택이 공연 전체의 구조 안에서 매순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배우의 발화와 움직임이 전통적인 연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면 그 거리두기가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는지는 더 선명하게 드러날 필요가 있었다. 로미오역의 배우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며 무대를 벗어나는 순간은 극장의 허구를 깨고 배우 개인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공연의 형식이나 관객과의 관계를 새롭게 여는 방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후반부의 남성 배우가 줄리엣을 연기한 장면 역시 인물을 고정된 성별이나 역할로 재현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읽혔지만 그 전환이 공연 전체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충분히 읽히지 않았다.
실험이 남긴 질문
연출의 글에서 반복되는 것은 '진짜'이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가짜여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3〉은 이 문제의식을 공연의 형식 안에서 실험한다. 극장은 애초에 약속된 허구의 공간이며 무대 위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실제 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관객은 그 허구의 시간 안에서 함께 듣고, 바라보고,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AI 음악 또한 인공적인 목소리로도 관객이 머물 수 있는 공연의 순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질문하는 장치였다.
다만 AI 음악은 공연이 길어질수록 한계를 드러냈다. 대본집은 제공되었지만 실제 공연에서 AI 음악 속 가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사집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AI 음악 특유의 목소리와 발음 때문에 가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순간이 많았다. 그럴 때 관객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리듬과 분위기밖에 없었다. 반복되는 비슷한 음색에 장면마다 다른 사건과 감정이 충분히 구분되지 못하는 인상도 있었다.
파티가 된 객석, AI 음악 속으로 들어간 대사, 조명과 탁구공과 자동차의 움직임, 감정을 덜어낸 배우의 발화는 모두 연극의 경계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물론 그 시도가 더 선명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AI 음악, 원작 서사, 퍼포머의 몸의 관계가 더 정교하게 연결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대사가 음악 속으로 들어갔을 때 관객이 무엇을 듣고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 배우의 몸이 장치들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구조적인 설계는 더 분명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로미오와 줄리엣 3〉은 관객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관객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극장에서 공연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이 공연은 고전 희곡을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다시 보여주기보다 그것이 오늘날 어떤 소리와 빛, 몸과 사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3〉은 AI 리스닝 파티를 통해 고전 비극이 다른 방식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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