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잃은 삿대질 <로줄3>

  • 작성자 최정원
  • 조회 48

방향 잃은 삿대질

2026-1 전문사 연출 III <로줄3>

임다연 (연극학과 연극학전공 전문사과정)


  <로미오와 줄리엣 3>이라는 이름의 공연은 과연 연극인가? 공연이 시작하고 40분경에 이르기까지 무대에는 누구도 올라오지 않는다. 무대 위에는 조명과 유압 사다리, 종종 움직이는 자동차와 음악을 컨트롤하는 DJ만이 존재하고, 남은 자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대사로 만들어진 음악이 채운다. 낯선 극장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아야 할지 방황하는 관객을 위한 말은 무대 양쪽에 붙어 있는 '핸드폰이나 하세요'라는 글귀뿐이다.


f6a059ae9969260bd560f56a0908e095_1783141440_1382.jpg

ⓒ김휘람


  무언가 사건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1층을 바라보던 관객들은 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할 거리를 직접 찾아 나선다. 관객들은 공연장 곳곳에 비치된 공을 1층 무대를 향해 던지기도 하고, 주변의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객석을 돌아다닌다. 음악을 들으며 환호성을 지르거나, 다른 관객과 함께 뛰며 음악을 즐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결국 배우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공연에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관객이 된다.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배우들은 관객과 함께 객석에 섞여있다. 이들이 배우로써 기능하는 경우는 장과 막이 바뀔 때 마이크로 고지해주는 순간뿐이다. 본격적인 등장 이후에도 잠시간의 연기가 끝나면 배우들은 또 다시 객석으로 올라와 관객과 섞인다. 다른 배우가 연기할 때에는 또 다른 관객으로써 호응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를 할 때에도 이들이 해당 장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배우 본인과 역할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지정된 역할 없이 장막마다 역할을 바꾸어가며 수행한다. 배우들이 등장할 때에는 음악 대신 배우가 대사를 발화하지만, 누구도 그것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있지는 않다. 말투는 의도적으로 딱딱하고 어색하며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핸드폰 화면의 대본을 보며 자신의 대사를 낭독할 뿐이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야 장면에서 배우들은 두 연인의 대사에 맞추어 바닥을 구르며 몸을 섞지만, 그것은 가까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멀어지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극의 후반부 비극으로 치닫는 부분도 그러하다. 로미오의 추방 소식을 듣고 절망하는 줄리엣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함께 ‘얼음땡’ 놀이를 하고, 캐퓰릿 경이 줄리엣에게 페리스와 결혼을 명하는 장면에서 홀로 무대에 서있는 배우는 ‘Fuck you’를 외치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한다. 

  이와 같은 장면들에서 배우가 취하는 행동은 원작의 표면적인 의미와는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얼음땡’의 경우 술래가 잡을만하면 ‘얼음’을 통해 빠져나가는 점이 엇갈리는 두 연인의 모습과 비슷하고, ‘얼음’을 하면 행동을 제한 당한다는 점에서 추방당해 행동반경을 제한 당한 로미오의 상황과 비슷하다. ‘Fuck you’ 역시 멋대로 결혼 상대를 정하는 캐퓰릿 경에 대한 줄리엣의 마음과 닮은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들이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의미는 원작과 전혀 닮아있지 않다.

  이것은 배우가 역할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절망에 대한 비극을 다루는 작품에서 배우들은 역할에 몰입하지 않고,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진지하게 다루기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원작과 형태가 겹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 속에 원작의 무게와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에서 관객은 ‘조롱’을 읽는다.

  공연은 끊임없이 원작을 조롱한다. 대사를 발화하는 말투에 변이를 주거나, 맥락이 맞지 않는 장면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배우들은 공연을 올리면서 의도적으로 대본조차 외우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에 대해 다룬 고전을 원작으로 삼았지만 AI를 메인으로 활용하여 무대를 구성했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불어 AI 창작 윤리가 창작자들 사이에서 논란인 가운데, 공연의 기반을 AI 창작물로 삼아 관객이 강제로 그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연출 방법은 원작의 서사적인 측면과 원작 외부의 사회적 맥락까지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롱의 목적은 공연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이 공연이 보여주는 것은 ‘조롱을 위한 조롱’으로 다가온다.


f6a059ae9969260bd560f56a0908e095_1783141540_9615.jpg

ⓒ김휘람


  <로미오와 줄리엣 3>은 전통적인 연극의 형식을 벗어나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흐리고 배우의 역할을 확장하며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를 해체하고 뒤집어 보며 어디까지 ‘연극’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식은 기계적으로 반대항을 수행하는 것에 그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연의 태도는 전통에 대한 조롱으로 읽히게 된다.

  문제는 이 공연이 행하고 있는 실험이 조롱 그 이상으로 해석되고자 하는 분명한 방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원작이 ‘무엇’이기 때문에 조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조롱한다. 그러나 그 목적 없음이 관객에게 가닿을 때에는 명확한 목적을 띄게 된다. 그것은 이 공연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가 ‘이해’가 아닌 ‘동조’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관객에게 명시적으로 안내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편하게 공연장을 오고 가거나 중간에 퇴장해도 된다는 것과 무대에 크게 적혀져 있는 ‘핸드폰이나 하세요’라는 문구이다. 3시간의 러닝타임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문구는 짐짓 관객을 위한 배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공연의 중반부에 다다르면 이것은 마치 공연에 동조할 생각이 없다면 나가도 좋다는 배제의 태도로 읽힌다.

  공연은 관객을 ‘방임’하면서도 계속해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작은 통을 달고 움직이며 관객에게 공을 던질 것을 유도하는 자동차나, 객석을 돌며 관객에게 악수를 요청하는 배우들도 그러하다. 음악을 듣는 행위 역시 모두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연장에 입장하는 순간 관객은 참여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공연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면 관객은 객석에 앉은 내내 압박감을 느끼거나, 종내에는 객석을 떠나야만 한다. 이때 관객에게 요구되는 동조는 공 던지기나 환호와 같이 적극적인 행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떠나거나 딴 짓을 해도 된다는 명시적인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단지 공연을 지켜보는 행위만으로도 관객은 공연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결국 공연이 마음에 들어서든, 공연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든 공연장에 자리한 모든 관객은 시험대 위에 서게 된다. 그것은 공연에 ‘참여’함으로써 무대 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면 떠나야 한다는 시험대이다. 그렇게 강제로 ‘참여형 연극’에 참여하게 된 관객은 결국 공연이 취하는 태도인 ‘조롱’의 공범이 된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이 공연을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공연에 참여한 관객의 태도에 따라 답이 나뉘게 될 것이다. 공연에 진심으로 동조한 관객에게는 공연의 조롱이 전통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일종의 쾌감이나 해방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하나의 연극적 경험이 될 수 있다. 반면 동조하지 못한 관객에게 공연은 객석에 앉아 있는 내내 평가를 받으며 퇴장을 고민하는 감각만이 남았을 것이다. 조롱에 공범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이 공연이 연극이 되기 위해서는 동조한 관객이 필요한 것이다.


무단 전재 및 배포 금지